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산리 전투 (문단 편집) === 독립군 책임론 === 청산리 전투와 관련하여 독립군 책임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청산리 전투의 원인에 대해 독립군이 경거하여 일본이 독립군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과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망신을 당해서 분풀이로 학살을 자행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선 전자를 보면 [[김경천]] 장군은 청산리 전투가 발생하기 전 일본이 중국군에게 독립군과 관련하여 압박을 가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해산하라고 했는데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며 독립군한테도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10월 4일...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간도 한국군을 일본의 부추김을 받은 중국군대가 해산하라 한단다. 이는 우리 독립군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363446|김경천,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학고방, 2019), 121.]] 1920년 봄부터 독립군이 북간도 지역에서 연합과 통합을 반복하고 국내 진입 작전까지 시도하면서 일제 입장에서 북간도 독립군이 굉장히 '불편한' 존재로 보이게 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따라 간접적인 압박 뿐 아니라 직접적인 공격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북간도의 독립군 입장에서 보면 느긋하게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준비하더라도 일정 이상 세를 불리면 일제가 간섭할 것은 뻔한 이치이므로 빠르게 전력을 모아 공격에 나서는 것도 꼭 틀린 선택지라고 할 것은 아니다. 이는 독립운동가끼리 노선의 차이를 보인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 한쪽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해석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간도 참변]]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은 배경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찍이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19사단과 28여단, 기타 관동군 부대를 동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은 독립군을 토벌하려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서 화풀이로 간도 참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정하고 간도의 조선인 세력을 초토화시키려고 계획까지 세워놓고도 청산리에서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 된다. 그동안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학살이 화풀이성이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이 청산리 전투보다 먼저 세워진 이상, '청산리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작전 목적 달성 실패가 간도 참변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위에서 서술하였듯 이미 일본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간도 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결심하고 대규모 부대를 간도로 투입하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